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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20세기 탐정, 21세기 소녀

20세기 탐정, 21세기 소녀 08. 이준하의 증언.

20세기 탐정, 21세기 소녀 08. 이준하의 증언.

 

 

핸드폰으로 공연시간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 윤하는 다른 공연으로 검색을 바꾸었다. 외국인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이였다.


굳었던 그녀의 얼굴은 결정했다는 듯이 편안해지곤 핸드폰을 닫았다.

 

"서두르자 오늘 저녁에 노먼 네루다가 하는 연주를 들으러 음악회에 가야하거든."

 

차가 황량한 거리와 샛길을 이리저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중충한 벽돌집이 늘어서 있는 곳 사이에 난 좁은 골목길에 도착해서 윤하는 차를 세우고 말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자신의 차를 아끼는듯 조심스럽게 차위에 커버를 씌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몰려있는 사이를 지나 빨래를 널려있는 집을 거치며 제기동 46번지에 도착했다. 집의 작은 나무 문패에 이준하라고 이름이 씌여 있는걸 보고 혼자 조용히 물었다.


'요즘도 문패를 다는 데가 다 있나?"

 

그렇게 궁금해 할 무렵 윤하는 문을 두드렸고 이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이가 있는듯한 남자의 씩씩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있어 쇠대문의 삐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년의 끝자락에 겨우 서있는 나이일 법한 등이 아주 살짝 굽은듯한 아저씨가 나왔다.


"이준하 순경님?" 윤하가 묻자 남자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누구시요?"

 

"어제 새벽에 살인사건 현장을 처음 발견하신 분이시라고- "


"보고서는 상부에 올렸는데." 그가 툴툴거리자 윤하는 코트의 가슴속으로 손을 넣더니 빼고는 악수를 청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순경님께 직접 자세한 사항을 듣고 싶었습니다."


윤하의 행동에 눈빛이 한층 너그러워지면서 이준하 순경은 윤하의 손을 잡았다.
"음... 그렇구만... 들어 오시게. 차라도 한잔 내올테니."

 

악수를 하고는 손을 주머니로 다시 가져가는데 난 볼수 있었다. 낡은 골댄 바지 안으로 들어가는 어렴풋한 초록빛을....

 


이준하 순경이 차를 내오는 동안 궁금증을 억제하지 못하고 윤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왜 아침처럼 네 이름 대고 네 지휘 들먹이지 않고 뇌물을 썼어?"


"신참들은 경찰서내에 내 이름만 듣고 상관의 지시만 받은 상태라 신비로운 존재로 여기지만 이준하 순경처럼 나이가 있거나 나보다 오래전부터 경찰계에 몸을 담은 사람에겐 난 이방인으로 느껴진다고. 게다가 그런식으로 이름하고 백을 앞세우면 건방지다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지. 하지만 치켜세워주면 또 술술 내뱉기도 하고. 나이가 있으니 가진것이라곤 자신의 직책의 자부심 밖에 안남은 나이니. 뭐 간당간당 잘리지 않고 눌러붙고 있는거지만 말야."


마침 이 순경이 차를 내왔고 우리는 바로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내 근무 시간은 밤 10시에서 아침 6시 까지입니다. 어젯밤엔 11시에 호프집에 싸움이 한번 있는것 빼곤 별다른 일 없이 조용했고. 밤 1시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순찰중에 오랜 동료를 만나 한동안 얘기를 나누고. 2시 무렵 다시 순찰을 돌았고. 아주 험하고 음산한 밤이였어. 거리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사람한명 보이지 않았고 차만 한두대 지날 뿐이였고. 사실...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한가해서 술이나 한잔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지. 그때 갑자기 사람이 살지 않기로 유명한 집 한채에 불빛이 보였지. 창가에 불을 본 순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는 마치 혼자말을 하듯이 문장을 "뭐뭐 했지" 또는 "뭐뭐 했고" 로 끝을 맺었다. 왠지 노망든 노인이 혼자얘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루해질 때 였다.

"난 그 현관문 앞까지 갔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대문으로 되돌아왔죠?"
윤하가 끼어들었다.
"왜그랬습니까?"


이준하 순경은 놀란듯 벌떡 일어나더니 윤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 사실이긴 한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무도 본사람이 없었는데. 사실 문 앞가지 가자 너무 조용하고 적막했지. 옆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내 산사람은 무섭지 않은데 그 집에서 폐렴으로 죽은 노인이 방안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상상을 하니 오금이 여간 저려야 말이지... 그래서 혹여나 가까운 거리에 순찰도는 젊은 순경놈이라도 있으면 같이 들어가잘려고 무전치려고 했지."


....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 시민들의 밤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등이 오싹했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습니까?"
"왠걸 강아지 한 마리도 없었지. 그래서 맘 단단히 먹고 다시 되돌아가 문을 열어봤지. 안은 조용했고, 불빛이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지. 벽난로 위에는 촛불이 타고 있더군. 빨간색 초였지. 그리고 불빛에 비친 건..."

 

"당신이 뭘 봤는지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은 방을 몇바퀴 빙빙 돌다가 죽은 사람 옆에 무릎을 굽히고 그 사람을 들여다 봤지요. 그런 다음 방을 가로질러 부엌문이 열렸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늙은 경관은 겁먹은 얼굴고 벌떡 일어나서 의혹이 담긴 눈초리로 윤하를 쳐다봤다.


"네....네놈은 대체 어디 숨어서 내 행동을 지켜본거지?!" 그가 소리쳤고 당황한 나에 비해 윤하는 침착하게 웃으며 자신의 명함을 건냈다.


"날 살인범으로 체포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 또한 사냥개지 늑대가 아니랍니다. 그것에 대해선 임병진 형사님과 박규리 형사가 보증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계속 하시죠. 그 다음엔 뭘 했지요?"

 

이준하는 의혹에 찬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의자에 다시 앉았다.


"난 다시 대문으로 돌아가 무전을 쳤지. 그러자 주위에 순경 세명이 나타났고."


"그때 까지도 거리는 텅 비어 있었습니까?"


"그랬지. 사람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


순간 윤하의 눈빛이 먹이를 찾은 매처럼 번뜩였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자 이준하 순경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 살아오면서 술 취한 사람은 많이 봤지만 그렇게 엉망으로 취한 사람은 처음 봤지. 그  작자는 내가 나갔을 때 정원 문 옆에 서 있었는데, 담에 기대어 목청껏 '동백아가씨'를 부르고 있었고.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서 제 힘으로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지."


"어떻게 생긴 사람이였습니까?"
윤하가 묻자 이준하는 엉뚱한 질문에 약간 짜증이 난듯 했다.


"그놈은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취해 있었어. 다른 상황 같았으면 경찰서로 끌고 갔었겠지."


"그의 인상착의는 기억나지 않나요?" 참다못해 조용히 앉아있던 내가 묻자 그는 날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뭐, 보긴 했지... 나랑 김배준 순경이 일으켜 세웠거든. 키가 꽤 크고.... 술을 많이 먹었는지 얼굴은 불그스름 했어. 비가 와서 머리에 그 후드인가 뭐시기를 쓰고 있어서 거기까지만 볼수 있었지."


"그만하면 됐어요." 윤하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니, 그사람 말고도 우린 할 일이 많았지. 시체가 있었지 않았나?!" 그가 불만스런 투로 말했다.
"자기 집으로 잘 갔겠지."


"옷은 어떻게 입고 있었죠?"
"밤색 잠바를 입고 있었어."
"택시 기사 와이셔츠 유니폼이 아니라요?"
"태...택시 뭘?"
"아냐... 비가 오는데다 튀고 싶지 않으니 잠바를 덮었겠지..." 윤하가 혼잣말을 하고선 다시 물었다.
"혹시 거기 차가 서있거나 나중에 지나가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까?"
"아니."


윤하는 모자를 들고 일어서면 말했다.


"이준하씨, 유감이지만 당신은 절대 경찰에서 출세할 위인은 못 되는군요. 머리는 장식이 아니라 사용하라고 붙어있는 겁니다. 당신은 어제 한 계급 승진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젯밤 당신이 붙잡고 있었던 사람은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장본인이자 우리가 찾고 있는 범인이기도 합니다. 지금 그런 얘기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냥 일이 그렇게 됐다는 말이죠. 성희야, 가자."


우리는 윤하의 말을 반은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해하는 경찰 뒤로 두고 마차로 향했다.


"얼간이 같은 놈!"
집으로 가는 차안 윤하는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도 그냥 놓쳐버리다니."
"난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을 들어보니 네가 말한 제 2의 인물과 인상착의가 일치하긴 하는데..... 뭣하거 거기를 떠난 후에 다시 돌아왔을까?"

 

"반지 때문이지, 반지! 바로  반지 때문에 다시 돌아온 거야. 범인을 잡을 방법이 없다면 우리가 반지를 이용해 그자를 유인해야겠어. 놈을 꼭 잡고야 말겠어. 이제 점심을 먹고 노먼 네루다의 공연이나 보러 가야겠다. 그녀의 주법과 활을 켜는 솜씨는 정말 근사하지. 그녀가 훌륭하게 연주하는 쇼팽의 소곡 제목이 뭐였지? '랄라 라 라 리라 리라 레이~"


윤하가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동안 나는 좌석에 기대 인간이 지닌 본성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